[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공주 출가시켜 주변국 통제하던 중국…위구르 등도 지참금 잇속 최대한 챙겨

입력 2021-09-13 17:39  

<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왕)소군이 옥구슬 안장을 건드리듯(昭君拂玉鞍)
말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엔 눈물 흐르네(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 궁인이지만(今日漢宮人)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라네(明朝胡地妾)

- 이백, 「왕소군(王昭君)」
화번공주(和蕃公主). 전통시대 중국에서 정략적인 이유로 이민족 군주에게 출가시킨 공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중국 천자의 딸이 직접 보내진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역모에 얽힌 황실 종친의 여식이나 먼 친인척, 제왕의 여식 혹은 황실 관계자 등이 주로 ‘대타’로 차출됐다. 예를 들어 당 현종 때인 717년 거란의 왕 이실활(李失活)에게 동평왕(東平王)의 외손 양씨(楊氏)를 영락공주(永樂公主)로 삼아 예물 6000단과 함께 시집보냈다. 726년에는 거란 송막왕(松漠王) 이소고(李邵固)에게 현종의 생질 진씨(陳氏)를 동화공주(東華公主)로 삼아 처로 줬다. 같은 해 요락왕(饒樂王) 이노소(李魯蘇)를 봉성왕(奉誠王)으로 삼고 성안공주(成安公主)의 딸 위씨(韋氏)를 동광공주(東光公主)로 삼아 혼인을 맺었다.
이민족과 화친하기 위해 보내진 ‘화번공주’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 군장에게 황실과 관련된 여성을 보내는 것은 한(漢)대에 시작됐다. 당(唐)나라 시기에 이르면 돌궐, 위구르, 토번 등을 대상으로 이 같은 형태가 반복됐다. 당나라 시대에는 이민족에게 보내지는 이들 여성을 두고 화번공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민족인 번족(蕃族)과 화친하고, 번족을 회유하기 위함이라는 뜻을 공주의 명칭에 담은 것이다. 주변 민족 입장에서도 중국의 공주를 얻어 당나라와 관계를 맺는 것은 국내외에 권위를 과시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구당서(舊唐書)》「토번전」에는 “토번의 군주 송첸캄포가 돌궐과 토욕혼이 모두 공주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재물을 가지고 혼인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측에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연히 화번공주의 파견을 결정했다. 《구당서》「돌궐전」에는 “해와 거란도 당의 공주를 얻었다. 이 예에 따르면 나는 왜 안 되는 것인가. 더구나 입번한 공주(화번공주)가 모두 천자의 딸은 아니라고 들었다. 지금 요구하는 것도 진짜 공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돌궐족 수장의 불만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안사의 난’ 이후 당의 힘이 약해지자 화번공주 제도는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포스트 안사의 난 시대에 큰 소리를 친 것은 위구르였다. 위구르의 칸은 대대로 당의 책립을 받아 공주를 처로 맞이했다. 하지만 난 이후 당이 급속도로 쇠약해지면서 반란 평정에 도움을 준 위구르는 우세한 입장을 활용해 당으로부터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려고 했다. 가장 큰 변화는 당이 처음으로 진공주(眞公主), 즉 황제의 진짜 딸이나 누이동생을 시집보냈다는 점이다. 당 숙종 건원 원년의 영국공주(寧國公主· 숙종의 2녀)나 덕종 정원 4년의 함안공주(咸安公主· 덕종의 8녀), 목종 장경 원년의 태화공주(太和公主· 목종의 12째 누이) 등이 이 같은 사례다. 특히 이들 진공주는 여느 ‘짝퉁 공주’들과 달리 유목민 특유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Levirate· 형이 죽은 뒤 동생이 형을 대신해 형수와 부부생활을 계속하는 혼인 풍습)의 대상이 돼 여러 번 결혼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함안공주는 충정가한(忠貞可汗), 봉성가한(奉誠可汗), 회신가한(懷信可汗)에게 차례로 넘겨졌고 태화공주는 갈살특근소례가한(曷薩特勤昭禮可汗), 호특근창신가한(胡特勤彰信可汗), 압삽특근(壓特勤), 오개가한(烏介可汗)의 네 명의 남편을 뒀다. 유목민들로선 ‘오리지널 프린세스’를 정말 귀하게 여긴 것이지만 이들 공주가 겪었을 정신적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큰 변화는 당이 화번공주들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딸려 보냈다는 점이다. 일각에선 진짜 공주냐 아니냐에 따라 지참금 액수가 달라진 점을 간파한 위구르가 지참금을 탐내 당에게 진공주를 보내도록 강요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에 당이 매년 비단 수만 필을 위구르에 보내기로 약속한 것은 훗날 송이 요와 서하, 금나라에 보낸 세폐(歲幣), 세사(歲賜), 세공(歲貢)의 선례가 되기도 했다.
힘 빠진 당나라 상대로 요구사항 늘린 주변국
하지만 위구르족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수의 위구르인이 당의 수도 장안으로 와서 많은 사여품을 요구했다. 또 상인들도 와서 자주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위구르와 당 사이의 주요한 거래는 견마무역(絹馬貿易)이었다. 위구르인들은 당의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많은 말을 가지고 와서는 거래를 강요하고 부당하게 많은 비단을 얻어냈다. 당으로선 재정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대에 중앙아시아 교역을 주름잡았던 위구르인들의 빼어난 경제적 관념이 반영된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들은 힘이 약해진 당나라를 상대로 쓸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서 잇속을 제대로 챙겼다. 그들은 진정 상대에게서 최대치를 뽑아낼 수 있는 능수능란한 상인이었다.
NIE 포인트
① 중국뿐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도 지방 호족들과 29건의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혼인이 통치 수단으로 쓰이는 이유는 왜일까.

② 무역을 하는 한 방법으로 중국이 주변국과 임금-신하 관계를 맺고 조공을 주고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③ 최근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총살당하기도 했는데,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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